Is Pure Altruism Possible? by 아거

Contemporary discussions of altruism quickly turn to evolutionary explanations. Reciprocal altruism and kin selection are the two main theories. [Is Pure Altruism Possible?]

이 대목 마음에 든다.
As Kant and Freud observed, people’s true motives may be hidden, even (or perhaps especially) from themselves. Even if we think we’re acting solely to further another person’s good, that might not be the real reason. (There might be no single “real reason” — actions can have multiple motives.)
세상에는 완전히 single real reason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6장. Hustling 읽고서 by nasol


6장을 읽기는 읽었는데, 뭔가 끄적이면서 메모도 하면서 읽기는 했는데 도저히 정리가 안된다. 깔끔하게 정리하는 건 아거님께 슬쩍 떠밀어 놓고, 대략 떠오르는 것들을 써봐야겠다. (영어를 이해하는 부분에서 잘못 이해한 내용이 있을 수 있으니 양해를 구합니다.)

 

Parapsychology 초심리학(심령 현상의 과학적 연구분야)
Design Machine – 저절로 보여주고 만들어주는 기계에 대한 아이디어
더 이상 화학자하기 싫은데 받아주는 데가 없어..
IBM – 하도급 매뉴얼 검수자로 일하다가 IBM 연구소에서 일할 기회가 생기는데..
아, 안느에게 그날 청혼했더라면..
두 딸이 아빠와 보낸 마지막 일주일

그 날부터 모든게 꼬이기 시작했다.

 

2장과 4장에 이어서 조지 프라이스에 대해 나온 내용이다. 이 책에서 제일 중요한 인물은 조지 프라이스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책 제목에 그의 이름이 들어갔을리가 없다..) 정작 조지 프라이스에 대한 장은 그닥 재밌게 읽히지 않는다. 아니, 우울하고 음울한 느낌이다.  3장과 5장은 참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은데.. 문득 이 책을 쓴 오렌 하만이라는 분은 일부러 그렇게 쓴 것일까 궁금하다. 조지 프라이스에 대해서 다룬 장에는 뭔가 침침한 느낌을 주어 신이 나지 않게 하고, 뭔가 질질 끌려가며 읽게 만드는 그런 느낌을 줌으로써, 그의 인생이 뭔가 나쁜 일이 벌어지기도 전에  비참하게 끝날 것이라는 느낌을 꾸준히 주려고 한 것일까? 마음대로 생각해본다.

 

6장의 초반에는 초심리학(parapsychology)에 대해 미국 사회가 들썩이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얘기가 왜 나오는지를 잘 이해못했다. 조지 프라이스가 어렸을 때 영혼과 대화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가 나중에는 이에 대해서 비판하고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실험을 대라고 요구하는데, 이에 대해서 몇몇 과학자들이 조지 프라이스를 공격한 얘기가 나온다. 초심리학이라.. 한국어로 이렇게 부르는지 잘 모르겠다. 이 논쟁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모르겠다. 이 책의 여러 곳에서 느끼는 부분이지만, 참 생생하게 그런 분위기를 전달해주는 것 같다. 이를 테면 조지 프라이스에게 보내는 독자의 편지 같은 것을 인용하는 부분이라든지..  ’과학자 양반, 세상에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도 많다우..’  어떤 과학자가 ‘조지 프라이스는 너무 얼토당토 않게 초심리학을 비판함으로써 오히려 이것이 알려지는데 기여하고 있다는’ 심지어 음모론(?) 까지도 제시한다. 사실 과학에 대해서 고등학교 때까지 성의없이 배운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이런 떠들썩함이 있었는지도 몰랐고, 실제로 초심리학이라는게 당연히 과학 아닌거 아냐? 라고 대충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논쟁을 보고 좀 웃기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러고보니, 뭐가 과학이다 아니다라고 말할 자격이 나에게는 없는 것 같다. 그래도 내 마음 깊은 곳에는 근거가 있던 없던, 영혼에 관한 것은 과학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자리하다보니,  조지 프라이스를 공격하는 과학자의 비판이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과학자의 비판 자체는 매우 강하게 들렸다. 누군가 강하게 주장하거나 열렬하게 호소하면 근거를 따져지지 않고 왠지 맞지 않을까, 틀린 소리를 저렇게 강하게 할리가 있을까, 하면서 슬그머니 믿고 싶어지는데, 과학자의 이런 비판을 보면서 스스로 근거를 따져보지 않고 목소리가 큰지 여부로 맞고 틀리다를 구분하는 건 역시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튼 이 얘기가 왜 나왔는지 궁금했는데, 조지 프라이스가 대중에게 알려지게 된 계기로 얘기한 게 아닌 가 싶다. 이 논쟁 자체는 이 책에서 얘기하는 이타심에 대한 것과는 큰 관련이 없는 것 같다.

결정적인 증거를 대라는 조지의 요구에 어떤 마술사가 응하지만, 결국 이 대결(?)은 흐지부지 되고 만다.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조지가 다른 문제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시작을 해놓고 끝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무척 많이 있고, 그것에 대해서 찔리는 경우가 많은데, 조지처럼 똑똑한 사람도 뭔가를 하다가 딴 거에 마음을 빼앗겨서 이전 거를 흐지부지 하는 걸 보니 좀 위로가 된다. 다음번에 뭔가를 흐지부지 끝내게 되면 조지를 떠올리면서 괜찮다고 넘어가야겠다.)

 

조지가 마음을 빼앗긴 대상은 Design Machine이었는데,  사실 어떤건지는 좀 생소하다. 책에 나온 설명에 의하면 ‘engineer’가 뭔가 생각을 해서 기계에게 알려주면, 이 기계가 그것을 3D로 보여주고, 실제로 금속으로 만들어내기도 해주는, 뭔가 자동적으로 뚝딱 해주는 기계인 듯 하다.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한창 홈페이지를 만드는 게 유행이었는데, 싸이홈피가 아니고, HTML로 웹페이지를 만드는 방식이었다. 메모장에다가 깨알같은 태그들을 쓰면서 뎅그렁한 표를 만든 걸 보고 신기해하면서 감동을 받았었는데 나모웹에디터란 게 있어서 비쥬얼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마우스로 골라서 넣으면 알아서 태그를 만들어주는 거였다. 조지가 생각했던 것도 그런 종류의 것이었을까? 잘 모르겠다. engineering, 엔지니어링이라는 게 뭐하는 건지 문득 궁금해진다. 너무 당연하게, 익숙하게 들어온 말인데, 공학, 뭐 하는 건데? 라고 물어보면, 대답하지 못할 것 같다. 학교 후배에게 전공을 물었더니, ‘civil engineering’이라고 대답했던게 기억난다. 토목공학이라고 했다.

사실 6장에 대한 이 포스트를 쓴다면 마지막 부분부터 시작하고 싶었다. 제일 최근에 읽어서 따끈한 것도 있겠지만, 6장에서 읽은 문장 중에서, 아니 2,4,6장 통틀어서 제일 나에게 기억에 남는 문장이 마지막 부분에 있었기 때문이다.

 

It was all that fateful day.. July 15, 1957 that his downward spiral began.

 

뭔가 올 것이 온 듯한 이 마지막 문장에 왠지 나는 머뭇거렸다. 안느에게 그 날, Piore의 제안을 받기 전날에 청혼을 했다면, 그는 Piore의 파격적인 제안을 당연히 받아들였을 것이고, 결혼도 하고 잘 살았을텐데..

 

그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것에 왜 나는 머뭇거렸을까? 그 때 그렇지 않았다면 happily ever after~ 했을텐데라고 마음이 안타까운 건 아닌 것 같다. 그럼 왜? 내 인생도 꼬였다고 생각해서일까? 아니면 조지처럼 똑똑하고 훌륭한 연구자의 인생도 꼬일 수 있다는 게 생소해서일까? 그러고보니 실제 인물에 대한 책을 읽은 기억 중에 비극적인 내용을 다룬 부분이 별로 기억이 안난다. 훌륭한 인물이라고 얘기하면서 실제 인물에 대해서 쓴 책이면, 얼마나 잘 나갔는지, 얼마나 중요한 역할들을 했는지 그런 내용이 많은 것 같다. 실제 얼굴을 맞대는 이들에게서 나는 그들 자신의 비극적인 얘기를 들은 기억이 별로 없다. 비극적인 얘기는 대부분 한다리 건너서 전해 듣는다. 이를 전해주는 이들은 보통 그 비극에 대해 그다지 애통해하지 않고, 아주 담담해 하지도 않는다. 비극을 즐기는 건 물론 아니겠지만.. 사실 그 비극은 전하는 이들과는 상관없다는 게 옳을 것이다. 상관없는 비극을 이들은 왜 전하는 것일까? 아, 우리는 서로 정보를 주고 받는 사회적 동물이었지.  그래서 그런가 싶으면서도, 그럼 왜 자신의 비극, 자신이 마음쓰는 비극은 전하지 않는 것일까?  나는 왜 나의 비극을 전하지 않을까? 아니 전하지 못할까?

 

으.. 이 포스트는 이 책의 6장을 읽고 깔끔하고 멋지게 생각한 내용을 정리하는것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지금이 밤 12시 반이어서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렇게 써야겠다. 블로그니까.  느낀 대로 써도 된다.

 

조지의 삶이 꼬이기 시작했다는 말이 나오는 대목에서,  물론 그 말은 조지 프라이스가 이후에 회상한 말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작가의 목소리와 겹쳐서 들렸다. 작가에게 조지 프라이스의 비극은 상관없지 않다. 작가에게 조지 프라이스라는 인물의 삶은 상관없지 않다. 작가는 조지 프라이스를 무조건 띄우거나 미화하지 않는다. 하지만 작가가 조지 프라이스에 대해 가지는 애정이 느껴진다.  이건 좀 나의 오버인지도.  이 작가가 조지 프라이스의 비극을 전하는 방식에 나는 호감을 느꼈다.

 

이 곳 스위스에서 이런 느낌이 들 때가 많다. 나는 너와 상관없다는 느낌. 네가 어떻게 살든, 양성애자이든 이성애자이든 동성애자이든 나랑은 상관없다는 그런 느낌. 네가 무슨 생각을 하든 관계없이 너를 받아들이겠다가 아니라, 네가 무슨 성향을 가지든, 나와 너의 삶이 겹칠 일은 없을 것이다는 그런 느낌. 이런 게 서로의 생각의 차이를 존중하는 건가? 뭔가 이건 다른 거 같은데..  그래서 나는 이 곳 생활이 춥다.
6장 정리. 조지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다.  나에게 상관없지 않은 비극을 저런 방식으로 전하고 싶다. 흠. 자야 할 때.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6장. Hustling 읽고서 by nasol


6장을 읽기는 읽었는데, 뭔가 끄적이면서 메모도 하면서 읽기는 했는데 도저히 정리가 안된다. 깔끔하게 정리하는 건 아거님께 슬쩍 떠밀어 놓고, 대략 떠오르는 것들을 써봐야겠다. (영어를 이해하는 부분에서 잘못 이해한 내용이 있을 수 있으니 양해를 구합니다.)
Parapsychology 초심리학(심령 현상의 과학적 연구분야)
Design Machine – 저절로 보여주고 만들어주는 기계에 대한 아이디어
더 이상 화학자하기 싫은데 받아주는 데가 없어..
IBM – 하도급 매뉴얼 검수자로 일하다가 IBM 연구소에서 일할 기회가 생기는데..
아, 안느에게 그날 청혼했더라면..
두 딸이 아빠와 보낸 마지막 일주일
그 날부터 모든게 꼬이기 시작했다.
2장과 4장에 이어서 조지 프라이스에 대해 나온 내용이다. 이 책에서 제일 중요한 인물은 조지 프라이스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책 제목에 그의 이름이 들어갔을리가 없다..) 정작 조지 프라이스에 대한 장은 그닥 재밌게 읽히지 않는다. 아니, 우울하고 음울한 느낌이다.  3장과 5장은 참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은데.. 문득 이 책을 쓴 오렌 하만이라는 분은 일부러 그렇게 쓴 것일까 궁금하다. 조지 프라이스에 대해서 다룬 장에는 뭔가 침침한 느낌을 주어 신이 나지 않게 하고, 뭔가 질질 끌려가며 읽게 만드는 그런 느낌을 줌으로써, 그의 인생이 뭔가 나쁜 일이 벌어지기도 전에  비참하게 끝날 것이라는 느낌을 꾸준히 주려고 한 것일까? 마음대로 생각해본다.
6장의 초반에는 초심리학(parapsychology)에 대해 미국 사회가 들썩이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얘기가 왜 나오는지를 잘 이해못했다. 조지 프라이스가 어렸을 때 영혼과 대화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가 나중에는 이에 대해서 비판하고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실험을 대라고 요구하는데, 이에 대해서 몇몇 과학자들이 조지 프라이스를 공격한 얘기가 나온다. 초심리학이라.. 한국어로 이렇게 부르는지 잘 모르겠다. 이 논쟁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모르겠다. 이 책의 여러 곳에서 느끼는 부분이지만, 참 생생하게 그런 분위기를 전달해주는 것 같다. 이를 테면 조지 프라이스에게 보내는 독자의 편지 같은 것을 인용하는 부분이라든지..  ’과학자 양반, 세상에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도 많다우..’  어떤 과학자가 ‘조지 프라이스는 너무 얼토당토 않게 초심리학을 비판함으로써 오히려 이것이 알려지는데 기여하고 있다는’ 심지어 음모론(?) 까지도 제시한다. 사실 과학에 대해서 고등학교 때까지 성의없이 배운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이런 떠들썩함이 있었는지도 몰랐고, 실제로 초심리학이라는게 당연히 과학 아닌거 아냐? 라고 대충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논쟁을 보고 좀 웃기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러고보니, 뭐가 과학이다 아니다라고 말할 자격이 나에게는 없는 것 같다. 그래도 내 마음 깊은 곳에는 근거가 있던 없던, 영혼에 관한 것은 과학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자리하다보니,  조지 프라이스를 공격하는 과학자의 비판이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과학자의 비판 자체는 매우 강하게 들렸다. 누군가 강하게 주장하거나 열렬하게 호소하면 근거를 따져지지 않고 왠지 맞지 않을까, 틀린 소리를 저렇게 강하게 할리가 있을까, 하면서 슬그머니 믿고 싶어지는데, 과학자의 이런 비판을 보면서 스스로 근거를 따져보지 않고 목소리가 큰지 여부로 맞고 틀리다를 구분하는 건 역시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튼 이 얘기가 왜 나왔는지 궁금했는데, 조지 프라이스가 대중에게 알려지게 된 계기로 얘기한 게 아닌 가 싶다. 이 논쟁 자체는 이 책에서 얘기하는 이타심에 대한 것과는 큰 관련이 없는 것 같다.
결정적인 증거를 대라는 조지의 요구에 어떤 마술사가 응하지만, 결국 이 대결(?)은 흐지부지 되고 만다.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조지가 다른 문제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시작을 해놓고 끝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무척 많이 있고, 그것에 대해서 찔리는 경우가 많은데, 조지처럼 똑똑한 사람도 뭔가를 하다가 딴 거에 마음을 빼앗겨서 이전 거를 흐지부지 하는 걸 보니 좀 위로가 된다. 다음번에 뭔가를 흐지부지 끝내게 되면 조지를 떠올리면서 괜찮다고 넘어가야겠다.)
조지가 마음을 빼앗긴 대상은 Design Machine이었는데,  사실 어떤건지는 좀 생소하다. 책에 나온 설명에 의하면 ‘engineer’가 뭔가 생각을 해서 기계에게 알려주면, 이 기계가 그것을 3D로 보여주고, 실제로 금속으로 만들어내기도 해주는, 뭔가 자동적으로 뚝딱 해주는 기계인 듯 하다.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한창 홈페이지를 만드는 게 유행이었는데, 싸이홈피가 아니고, HTML로 웹페이지를 만드는 방식이었다. 메모장에다가 깨알같은 태그들을 쓰면서 뎅그렁한 표를 만든 걸 보고 신기해하면서 감동을 받았었는데 나모웹에디터란 게 있어서 비쥬얼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마우스로 골라서 넣으면 알아서 태그를 만들어주는 거였다. 조지가 생각했던 것도 그런 종류의 것이었을까? 잘 모르겠다. engineering, 엔지니어링이라는 게 뭐하는 건지 문득 궁금해진다. 너무 당연하게, 익숙하게 들어온 말인데, 공학, 뭐 하는 건데? 라고 물어보면, 대답하지 못할 것 같다. 학교 후배에게 전공을 물었더니, ‘civil engineering’이라고 대답했던게 기억난다. 토목공학이라고 했다.
사실 6장에 대한 이 포스트를 쓴다면 마지막 부분부터 시작하고 싶었다. 제일 최근에 읽어서 따끈한 것도 있겠지만, 6장에서 읽은 문장 중에서, 아니 2,4,6장 통틀어서 제일 나에게 기억에 남는 문장이 마지막 부분에 있었기 때문이다.
It was all that fateful day.. July 15, 1957 that his downward spiral began.
뭔가 올 것이 온 듯한 이 마지막 문장에 왠지 나는 머뭇거렸다. 안느에게 그 날, Piore의 제안을 받기 전날에 청혼을 했다면, 그는 Piore의 파격적인 제안을 당연히 받아들였을 것이고, 결혼도 하고 잘 살았을텐데..
그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것에 왜 나는 머뭇거렸을까? 그 때 그렇지 않았다면 happily ever after~ 했을텐데라고 마음이 안타까운 건 아닌 것 같다. 그럼 왜? 내 인생도 꼬였다고 생각해서일까? 아니면 조지처럼 똑똑하고 훌륭한 연구자의 인생도 꼬일 수 있다는 게 생소해서일까? 그러고보니 실제 인물에 대한 책을 읽은 기억 중에 비극적인 내용을 다룬 부분이 별로 기억이 안난다. 훌륭한 인물이라고 얘기하면서 실제 인물에 대해서 쓴 책이면, 얼마나 잘 나갔는지, 얼마나 중요한 역할들을 했는지 그런 내용이 많은 것 같다. 실제 얼굴을 맞대는 이들에게서 나는 그들 자신의 비극적인 얘기를 들은 기억이 별로 없다. 비극적인 얘기는 대부분 한다리 건너서 전해 듣는다. 이를 전해주는 이들은 보통 그 비극에 대해 그다지 애통해하지 않고, 아주 담담해 하지도 않는다. 비극을 즐기는 건 물론 아니겠지만.. 사실 그 비극은 전하는 이들과는 상관없다는 게 옳을 것이다. 상관없는 비극을 이들은 왜 전하는 것일까? 아, 우리는 서로 정보를 주고 받는 사회적 동물이었지.  그래서 그런가 싶으면서도, 그럼 왜 자신의 비극, 자신이 마음쓰는 비극은 전하지 않는 것일까?  나는 왜 나의 비극을 전하지 않을까? 아니 전하지 못할까?
으.. 이 포스트는 이 책의 6장을 읽고 깔끔하고 멋지게 생각한 내용을 정리하는것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지금이 밤 12시 반이어서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렇게 써야겠다. 블로그니까.  느낀 대로 써도 된다.
조지의 삶이 꼬이기 시작했다는 말이 나오는 대목에서,  물론 그 말은 조지 프라이스가 이후에 회상한 말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작가의 목소리와 겹쳐서 들렸다. 작가에게 조지 프라이스의 비극은 상관없지 않다. 작가에게 조지 프라이스라는 인물의 삶은 상관없지 않다. 작가는 조지 프라이스를 무조건 띄우거나 미화하지 않는다. 하지만 작가가 조지 프라이스에 대해 가지는 애정이 느껴진다.  이건 좀 나의 오버인지도.  이 작가가 조지 프라이스의 비극을 전하는 방식에 나는 호감을 느꼈다.
이 곳 스위스에서 이런 느낌이 들 때가 많다. 나는 너와 상관없다는 느낌. 네가 어떻게 살든, 양성애자이든 이성애자이든 동성애자이든 나랑은 상관없다는 그런 느낌. 네가 무슨 생각을 하든 관계없이 너를 받아들이겠다가 아니라, 네가 무슨 성향을 가지든, 나와 너의 삶이 겹칠 일은 없을 것이다는 그런 느낌. 이런 게 서로의 생각의 차이를 존중하는 건가? 뭔가 이건 다른 거 같은데..  그래서 나는 이 곳 생활이 춥다.
6장 정리. 조지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다.  나에게 상관없지 않은 비극을 저런 방식으로 전하고 싶다. 흠. 자야 할 때.


5장.시카고 경제학과 시카고 생물학 by 아거

5장을 열고 닫는 이야기는 죄수의 딜레마다. 수학천재 존 폰 노이만이 5장의 문을 연다. 소련을 의식해 막대한 돈을 쏟아부어 핵무기를 개발해야 할 미국은 이를 위한 맨하탄 계획을 수립했고 존 폰 노이만은 청문회에서 소련에 대한 불신을 명확히 공표하고 핵개발을 역설했다. 여섯살때 8자리수의 나눗셈을 머리로 해냈던 존 폰 노이만은 26살때 프린스턴대학에서 아인슈타인 옆방에 자리를 잡았다. 아인슈타인이 ‘느리면서도 응시적’이었던데 반해, 폰 노이만은 그 반대로 전광화석처럼 빨랐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점심때 뭘 먹었는지 기억을 못하던 그는 20년전에 읽었던 책을 모두 외울 정도로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였다. 수소폭탄을 개발하는 이 중요한 문제에서 수학사에 길이남는 이 천재 수학자가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이 5장을 여는 질문이다. 바로 수소폭탄를 개발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딜레마는 경제학과 생물학을 관통하는 인간 본성의 미스테리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고 저자는 운을 뗀다.

[완전경쟁과 자유]
먼저 아담 스미스:
The more ruthless the competition, the greater the social good; individual selfishness leads to collective benefits and plenty.
시카고 경제학파의 시작과 역사적 중요성이 업급된다.
perfect competition was important because it guaranteed individual freedom.

저자는 경제학을 관통하는 다섯가지 문제들은 모두 선택의 문제에 결부되는데, 그 선택을 견인하는 힘은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는 프랭크 나이트의 견해를 들려준다: 개입 vs. 완전자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유시장체제론의 진원지인 시카고 경제학과의 탄생을 들려준다.

경쟁의 결여가 근원적 문제가 아니며 정부의 적극적 개입을 통해 ‘보이지 않는 손’원칙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 케인즈의 책의 여백에 프랭크 나이트는 ‘nonsense’라고 적었다고 했고, 그와 함께 케인즈학파에 넌센스 딱지를 붙인 경제학자들이 시카고 경제학파를 이끌고 전후 미국에 큰 영향을 준다.

그렇다면 시카고 경제학과 진화론은 도대체 어떤 관련이 있단 말인가? 복지 경제학을 링의 코너로 밀면서 시카고 경제학파의 제이콥 바이너는 ‘survival of the fittest’가 게임의 법칙일 뿐만 아니라,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며 이 이기적이라는 것은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행복’으로 이끄는 진리요 길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경제학 301을 듣고 전율했던 밀턴 프리드먼은 이후 시카고 학파를 빛낸 청출어람의 경제학자가 된다. 물론 46년 프리드만이 시카고에 왔을 때 상황은 프리드편이 아니었다. 공황과 전쟁의 여파로 사람들은 극한 자유경쟁이 아닌 정부의 적극적 개입을 원하고 있었다. 이차대전이 끝나고 15년 이 지난 다음에 나왔떤 그의 “자본주의와 자유”라는 책을 뉴욕타임즈, 시카고 트리뷴, 타임, 뉴스위크등은 리뷰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혹자는 19세기에 존 밀턴의 On Liberty가 있었다면 20세기에 프리드만의 책이 있다고 할 정도로 ‘자유’에 관한 선언적인 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크로포트킨처럼 프리드만이 아나키스크가 기꺼이 되었을 지도 모르지만, 불행히도 그는 개인의 자유들이 종종 충돌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마치 ‘My freedom to move my fist must be limited by the proximty of your chin’이라고 역설했던 윌리암 더글라스 대법관의 명언처럼..

크로프트킨이 ‘creatures들은 본질적으로 cooperative’라고 본 반면, 러시아 이민자의 후손이었던 밀턴 프리드만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경쟁적이고 이 경쟁은 늘 최상의 결과를 만들어낸다’고 보았다.

[알프레드 에머슨]
이 책의 5장은 시카고 경제학파의 태동과 함께 같은 시기 시카고대학 생물학, 동물학과의 거장들도 함께 조명한다.
termite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찬 알프레드 에머슨은 1929년 시카고 생물학과에 오게 된다.

그를 괴롭혔던 것은 termite의 수수께끼였다. 태어난 순간에는 서로 다르지 않는데 어떻게 이들은 각자의 카스트로 편입되어, 누구는 싸우는 개미로, 누구는 일개미로 변신하여 사는 걸까? 에머슨은 서얼 라이트에게서 아이디어를 얻는다. 진화의 기본단위가 개인이 아닌 집단이라는.. 그는 라이트에게서 얻은 아이디어로, 그리고 다른 이에 의해서 소개된 ‘항상성(homeostatis)’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흰개미에 대한 수수께끼에 대해 나름의 결론을 내린다. 한 집단 안에 속한 개인은 약간 희생하더라도 그것이 결국에는 집단의 생존에 기여하게 된다. [나솔님의 정리: 5장]

에머슨은 결국 개인들은 전체에 종속되기에 ‘협력이라는 것은 전체로서의 기능을 담당하는 가운데 나오는 부산물’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마치 몸속의 세포들이 전체 유기체를 위해 복무하듯, 개별 유기체들은 전체 유기체에 종속된다는 비유가 그의 생각을 대변한다. 이 가운데 homeostatis는 부분과 전체의 갈등에 대한 해결책이 된다. 개인들의 이익과 전체의 이익간에 줄다리기가 있을 때, 이를 조절해 주는 것이 바로 homeostasis라는 것이다. 그는 서얼 라이트를 통해 자연선택이라는 것이 개인에게서만 아니라, 전체 population에서도 발생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수학적으로 ‘그룹 선택’을 증명하려 했다. 개인에게는 좋지 않는 일이 그룹을 위해 좋은 일이 되는 경우처럼..
‘social cooperation의 생물학적 근본’이라는 책에서 에머슨은 ‘the more homeostasis, the more evolution moved away from conflict and competition’을 보여주려 했다. 여기서 그 유명한 모토가 나오게 된다; United we stand, divided we fall. 뭉치면 일어서고 나뉘면 무너진다.. 흩어지면 죽는다..

하지만 이 생각은 뒤에 같은 시카고 대학의 워더 앨리에 의해 도전을 받는다.

[워더 클라이드 앨리]

인디애나의 농장에서 자란 워더 클라이드 앨리가 시카고 대학에 왔을 때, 그는 신앙이었다.자연을 사랑했던 그는 신이 그의 창조물에 부여했던 모든 힘들을 연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들뜬 기대속에 생태학을 배울 수 있었던 시카고에 왔다. 하지만 각각 stream과 pond에 사는 등각류(isopods)가 환경의 변화에 반응해서 각기 다른 태생지 등각류에서 나타나는 행동을 보이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그는 ‘신의 섭리’가 아닌 ‘환경에 상호작용하는’ 동물군의 신비를 벗겨냈다. 다시 말해 신이 부여한 ‘유전형질’에 어긋나는 동물들의 행태를 통해 신의 손이 아닌 진화론적으로 발전하는 동물생태학앞에서 그는 과학자로 거듭나게 된다.

셀과 유기체, 개인과 전체 population을 같은 선상에서 놓고 해석하면서 전체에 종속되는 개인들이 ‘homeostatis’에 의해 움직인다고 본 에머슨과 달리, 앨리는 ‘각 개인들이 중요하기 때문에 협력이 발생한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그는 헉슬리가 틀렸기 때문에 소셜 다윈이즘도 틀렸다고 했다. 대신 상호부조론의 크로포트킨에서 정답을 찾았다.

에머슨처럼 앨리도 ‘개인이 전체 파퓰레이션에 대한 관계는 셀이 몸에 대한 관계와 같다’고 보면서도, 이 비유가 충분치 않다고 보았다. 만약 population들이 개별 특질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superorganism’이 진짜 살아있다면, 과연 그게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고 싶어했던 그는 닭들에게서 보이는 위계와 선택을 통해 그룹이라는 것은 개인들이 모인 것에 불과하다는 조지 심슨의 결론에 도달하는 듯 싶었다. 바로 지배적인 hens가 종속적인 hens에 비해 더 많은 달걀을 낳는다는 것이다. 마치 선택이라는 것이 개인들위에서만 작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the stronger and more aggressive gaining a larger representation in future generations.

이 발견에 고무되어 앨리는 ‘integration이라는 것이 어쩌면 의미없는 것일 수 있다’고 보고 ‘그룹이라는 것은 개인의 집합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는 심슨의 주장에 마음이 기울었다. 하지만 서얼 라이트의 ‘group selection equations’을 보고 감동을 하게 되어 다른 설명을 찾던 그는 매우 고무적인 발견을 하게 된다: “social unstable flocks ate less, were scrawnier, laid fewer eggs, and had smaller combs than flocks where hierarchy was well established.” 그뿐만 아니라 지배-종속이 일단 확립되고 나면 그룹에서 전체적 공격성이 현저히 떨어짐으로써, 위계라는 것이 그룹적 특성이라는 해석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성게(sea urchins)와 닭을 통해 앨리는 자연계에는 두가지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바로 개인적 발전과 보전을 이끄는 자기중심적인 egoistic drive와 그룹 보전을 이끄는 그룹 중심적이고 다소 altruistic drive. 그리고 더 많은 사색을 통해 그는 ‘협력적인 힘이 생물학적으로 더 중요하고 필수적이다’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조지 게이로드 심슨]

20세기 가장 중요한 고생물학자로 여겨지는 조지 심슨은 2차대전의 종말과 히틀러의 패망을 목격하면서 ‘히틀러는 한명이면 족하다’는 생각을 갖는다. 시카고 생물학파의 ‘aggregation ethics’은 결국 ‘superorganism’과 ‘그룹 선택’ ‘사회적 통제’를 낳았다고 본 것이다. 심슨에게 그룹은 개인들의 집합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면 그룹은 독자적 생명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진화의 기본단위도 될 수 없다고 보았다: 바로 개인이 ‘선택’의 근본 단위라는 생각이다.

5장 읽는 중.. by nasol


4장은 읽다가 약간 건너 뛰었고, 느릿느릿 5장을 읽고 있다. 왜 속도가 잘 안 나는지 모르겠다.
아직 다 읽지 모했고, 다음장은 킨들 2500페이지라는데 지금 2150 정도 읽고 있다. 5장을 다 읽고 정리하는 기분으로 쓰려고 했는데, 소셜리딩 블로그가 허전할 것 같아서 그냥 중간용으로 주절거려본다.
5장에서 역시 여러 인물들이 나온다, 라이트에게서 배우는 에머슨, 에머슨의 생각을 비판한 심슨, 천재끼가 다분한 폰노이만, Isopod가지고 실험했던 알레에(Allee) 등.. 그리고 경제학자에 대한 얘기도 나온다. 케인즈와 밀튼 프리드만. 혹 뒷부분에 또 새로운 인물이 나올지 모르겠다.
내용을 전체적으로 정리를 못하긴 했지만 5장은 속도는 천천히 나가더라도 진지하게 읽게 된다. 이 학자가 왜 그런 고민을 하게 되었고, 왜 그 학자에게는 중요했는지.. 예를 들어 Allee는 원래 독실하게 신의 존재를 믿었는데,  Isopod를 가지고 실험하고, 그 결과에 과연 신의 ‘손’이 존재해서 생물체의 행동을 조절하는지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된다. 물론 그의 고민을 깊이 이해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건 ‘고민’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나를 사로잡은 고민은 무엇인가? 그런 고민이 있기는 한가? 그 고민의 답을 찾기 위해 나는 어떤 노력을 하고, 어떤 실험을 해보고, 어떤 시도를 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을 나에게 던지게 된다.
그리고 5장에는 에머슨이라는 학자가 나오는데, 그를 괴롭혔던 것은 흰개미(termite)의 수수께끼였다. 태어난 순간에는 서로 다르지 않는데 어떻게 이들은 각자의 카스트로 편입되어, 누구는 싸우는 개미로, 누구는 일개미로 변신하여 사는 걸까? 에머슨은 라이트에게서 아이디어를 얻는다. 진화에의 기본단위가 개인이 아닌 집단이라는.. 그는 라이트에게서 얻은 아이디어로, 그리고 다른 이에 의해서 소개된 ‘항상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흰개미에 대한 수수께끼에 대해 나름의 결론을 내린다. 한 집단 안에 속한 개인은 약간 희생하더라도 그것이 결국에는 집단의 생존에 기여하게 된다.
그는 순수하게 머릿 속의 생각의 흐름을 따라간 듯 하지만 나는 이런 우려가 들었다. 누군가 나보고 전체를 위하여 너 하나를 희생하라고 하면, 나는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누가 될 수 있을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또는 조직이 개인에게 ‘집단’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라고 할 수 있을까? 자연에서는 그게 어떻게 일어날까? natural selection이라고 하지만, 선택을 하는 ‘주체’의 개념이 있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어떤 것이 살아남게 되었는지, 이 인과관계를 ‘선택’이라는 말로 표현한 정도라고 나는 이해했다. 확신은 안간다. 흰개미는 어찌어찌하여 일개미가 된 거겠지만, 다른 개미가 일개미에게 ‘너는 일개미를 하여라’라고 명령한 것은 아니었을 것 같다. 이런 의문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저자는 심슨을 등장시킨다. 만화주인공은 아니고 ^^ 심슨은 에머슨의 이러한 생각은 결국 전체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진화가 일어나는 기본 단위는 집단이 아니라 개인 단위라고 주장한다. 개인에게는 집단보다 개인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진화가 일어나는 기본단위가 개인인지, 집단인지는 모르겠지만 에머슨의 생각을 따라가다보면 집단 선택이라는 것도 참으로 그럴 듯하게 들린다.
과학자의 세계를 잘 알 수는 없지만, 어떤 고민이나 생각자체는 순수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생각이 사회에서 특정 목적을 가지고 악용될 가능성도 많은 것 같다. Social Darwinism이라는 것도, 다윈의 연구업적을 기반하여 독일에서 생겨났다고 하는데, 어떤 왜곡이 생겨 집단이 강해지려면 전쟁, 인종을 순수하게 만드는 것은 불필요하다라는 주장이 된다. 참 묘하다. 다윈의 연구업적이 없었다면 Social Darwinism이 기반할 곳이 없었으니, 다윈은 Social Darwinism이 생겨날 수 있도록 일조했다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하나의 연구 결과에 근거해서 어떤 식으로 바뀌어 가고 하는것은 먼저 존재한 것이 통제할 수는 없을테니, 그 책임을 물을 수도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모든 뒤에 나올 결과를 예측해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어떤 연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문제’라는 것도, 누가 보느냐에 따라서 문제일 수도 있고,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복잡하다. 과학과 사회는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고, 사람과 사람도, 사람과 집단도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학자의 생각과 다른 학자의 생각도 연결되어 있다. 당연한 건지도 모르는데, 이 책을 읽다보면 그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더욱 와닿는다. 사람이 많은 거리를 걸을때, 여러 사람들과 부대껴 걸어가면서도, 이들과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못 받을 때가 많은데, 책을 읽으면서, 세상은 복잡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구나라고 느끼는 것을 보면, 내가 뭔가 잘못 살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책에서만 연결되어 있는 상태를 느끼는게 옳은 걸까? 일상에서도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면 좋지 않을까?  연결되어 있다는 걸 느끼는 건 좋은 것도 같지만 무섭기도 하다. 연결되어 있다는 걸 더 느낀다는 말은 그만큼 나를 내보이는 일일텐데, 불신이 있다. 나보다 더 능수능란한 사람이 나를 보고 ‘초짜’구나, 악용하면 어쩔까, 이런 생각에 무섭다. 그래서 연결에 나를 완전히 내던지지도 못하고, 아예 마음을 접지도 못하고 주춤거린다.


3장. 이타심의 기원에 대한 삼총사의 풀이 by nasol

삼총사는 다윈의 자연선택에 대해서 지지를 했는데요, 다윈이 개미의 이타적인 행위를 보고 갸우뚱 했듯이, 삼총사도 이타적인 행위가 과연 어떻게 자연선택이라는 과정을 겪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의아해했습니다. 이타적인 행위라는 말에 ‘나 생존에는 불리하지만, 남의 생존에 유리한 행위’가 포함되기 때문에 이타적 행위를 하는 개체는 번식에 불리했을 것이고 결국에는 그런 속성(trait)이 없어졌을 텐데요, 이타적인 행위라는 속성은 어떻게 살아남은 걸까요?

How could traits that reduced fitness be selected going against the interest of those who bear them?

(어떤 속성을 가지는 그 개체의 fitness를 감소시키는 속성이 어떻게 선택될 수가 있었나? 결국에는 그 개체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

여기서 문득, 3장의 제목인 ‘Selection’을 떠올려보면,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다윈의 자연선택의 Natural Selection이라는 진화의 한 큰 축이고요. 또 하나는 Selection of Altruistic traits – 이타적인 속성이 결과적으로 선택되었다는 것. 3장에서 삼총사가 자연선택을 나름대로의 모델로 계승(?)했다고 설명하고, 뒤에서는 이타적 행위가 선택된 이유를 풀이한 내용을 소개한다고 볼 때, 제목은 두가지를 다 포괄하는 역할을 잘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오버해서 생각한 것일까요? ^^

3장의 뒷부분에는 이 수수께끼에 대한 삼총사의 각각의 설명을 소개하는데요, 이 내용을 포스트에서 간단히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피셔와 홀데인은 이 수수께끼의 실마리를 ‘친족관계(kin)’에 근거한 자연선택으로 접근했고요, 라이트는 ‘임의적 표류’로 설명했습니다. ‘임의적 표류’라는 라이트의 설명과는 별개로 라이트는 유전자를 공유할 확률을 나타내는 ‘r’이라는 계수(?)를 소개하는데요, 이것이 나중에 뭔가와 연관될 것이라는 인상을 풍깁니다.

이타적 행위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피셔의 대답 – 나비와 애벌레의 예

이 수수께끼의 해답을 설명하기 위해 피셔는 나비와 애벌레의 예를 듭니다. 나비와 애벌레는 역겨운 맛이 나는데요(trait), 새가 나비의 몸통을 한 입 베어먹으면 새는 ‘퉷’하고 나비를 살려둡니다. 이 경우에는 역겨운 맛이라는 속성이 자연에 의해 선택된 것이 이해가 되죠. 나비가 살아남는 데에 공헌을 하니까요. 문제는 애벌레입니다. 나비는 살아남지만 애벌레는 한입 베이면 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벌레의 역겨운 맛 속성을 사라지지 않고 남았습니다. 피셔는 애벌레가 혈족관계가 있는 다른 애벌레들과 무리지어 다닌다는 점에 주목하고, 한입 물린 애벌레는 죽더라도, 같은 유전자를 공유할 확률이 높은 형제자매사촌 애벌레는 살게 된다는 거죠. 즉 ‘역겨운 맛’을 내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던 물린 애벌레는 죽을 지 몰라도, 맛을 본 새는 다른 애벌레를 잡아먹지 않으니까, 이 유전자를 공유할 확률이 높은 가족,친척 애벌레는 살아남아서 유전자를 퍼뜨린다는 거죠.

Unlucky caterpillar would have sacrificed itself for its brothers and sisters, losing its life in a final act of gallant altruism.

Natural selection could produce distatefulness in individuals to ensure that more of their shared genes of brothers and sisters who were spared.

피셔는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집단 내 애벌레가 서로 연관이 덜 되어 있을 수록, selective effect는 약해지고, 이타심이 진화할 가능성도 적을 것이다.

즉, 애벌레의 무리가 서로 생판 남이었다면, 역겨운 맛을 내는 유전자는 자연에 의해서 선택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얘기같습니다. 무리 내에 있는 개체가 서로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이타적인, 자기 희생하는 속성은 없어졌을 거라고요.

그래서 피셔는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the importance of relatedness.

피셔는 논문(1918)에서 친척개체간의 유전자적인 거리(genetic distances)를 계산하는 표를 소개합니다.

홀데인의 대답 – 어미사슴의 예

이타적 행위가 살아남은 데 대한 홀데인의 대답은 피셔의 대답과 비슷했습니다. 홀데인은 1928년의 에세이에서 암컷 사슴의 예를 드는데요, 저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어미사슴 두마리가 각각 새끼를 데리고 있다가, 늑대의 공격을 받을 때, 한 어미사슴은 새끼를 버리고 도망치고, 다른 어미사슴은 대신 희생하고 새끼를 지키는 경우가 있다고 할 때, 새끼를 지킨 사슴은 새끼가 살아남아 그 사슴의 유전자를 물려주게 되기 때문에, 희생한 어미사슴의 유전자는 살아남게 되고 도망친 어미사슴의 유전자는 살아남지 못하게 된다.”

즉 홀데인은 이타심이란 가족에 국한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가족이 살아남게 돕기 때문에 자연이 이타심을 ‘선택’해줬다고 생각한 거죠.

I doubt if man contains many genes making for altruism of a general kind though we probably possess an innate predisposition to family life.

… altruistic behavior is a kind of Darwinian fitness, and may be expected to spread as a result of natural selection.

그리고 읽다가 이 부분이 눈에 띄었습니다.

However much he believed in worker solidarity, Haldane was a lover of mankind who trusted no one. (1462-1468)

(홀데인이 노동자의 연대에 대해서 믿었을지는 모르지만, 그는 아무도 신뢰하지 않는 인류를 사랑한 이었다.)

이 문장을 저는 이렇게 이해했어요. 홀데인은 맑스주의자였는데요, 노동자의 연대에 대해서는 믿었을지 모르지만, 그의 기본적인 생각은 인류란 아무도 신뢰하지 않는 존재였다. 이 문장에서는 이 글의 저자가 홀데인에 대해서 약간은 모순을 지적하는 뉘앙스가 있지 않나 했습니다. ‘인간은 타인을 믿지 않는 존재’라고 생각하면서, 노동자가 연대하는 것은 어찌 가능할 거라고 믿는거야?’ 이렇게 꼬집는 듯 합니다. 이런 지적은 3장의 마지막에서 이어집니다. 3장의 마지막에 홀데인의 말년에 대해 나오는데요, 홀데인은 가족을 위해서만이 개체는 자신을 희생할 수도 있다고 믿지만, 자신은 굉장한 열정을 불살랐음에도 정작 자기 자식은 남기지 않았던 거죠.

여튼, 이렇게 피셔와 홀데인은 이타심은 생판 남을 위한 희생이 아닌, 혈연관계, 유전적으로 관계가 있는 이들을 위한 희생이며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의 번식에 유리하므로 자연이 선택한 것이다, 이런 관점을 공유합니다.

하지만..

A generalized mathematical model was lacking. The evolution of kindness would have to wait for a new champion. (1485)

친척관계와 이타심이 연관이 있을 거라는 아이디어는 있었지만, 이를 일반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수학적 모델은 아직 없었습니다. 친절함의 진화는 새로운 챔피언을 기다려야 했다.. 라는 대목에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는 이타심의 기원은 실제로 친척관계와 연관이 있다는 얘긴가? 즉, 순수하게 나와 연관이 없는 이를 위한 이타적인 행위는 존재하지 않는가? 또는 선택되어 살아남을 수 없는가? 이것이고요, 또 하나는 이타심을 친척관계로 설명하는 수학적 모델을 제시해줄 이, 즉 이 책의 주인공인 조지 프라이스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입니다.

라이트의 대답 – 임의적 표류와 유전적 연관계수(r)

라이트는 임의적 표류에 의해서 이타적 행위가 생긴다고 합니다. 데모하는 시민의 예를 들어서, 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제가 이해한 대로 써볼게요)

중심대로변에 이기적인 시민과 이타적인 시민이 섞여 있다면, 이타적인 시민은 빨리 갈 수 없을 것이다. 이기적인 시민은 새치기를 할 수도 있고, 이타적인 시민은 다른 이들이 잘 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하다보면 늦어질 것이다. 즉, 이타적, 이기적 시민이 섞여 있는 상태에서는 이타적 시민의 fitness가 이기적 시민의 것보다 적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타적 시민으로만 이루어진 한 그룹이 무리에서 빠져나와 다른 길로 목적지를 향해서 간다면, 이들은 이기적 시민으로 이루어진 그룹보다 더 빨리 도달할 것이다. 즉, 이타적 속성은 intergroup, 한 그룹 내에서는 경쟁력이 떨어지지만, 그룹 간의 경쟁, intragroup의 경쟁에서는 우월하다. 결국 이타적 시민으로 이루어진 그룹은 섞인 그룹보다 fitness가 크므로 살아남는다. 이를 집단선택(group selection)이라고 부르는데요.

Wright’s model depended on “group selection,” on natural selection sometimes weeding out or favoring whole groups rather than individuals.

그 결과 이타적인 개체가 많은 집단이 이기적인 개체가 많은 집단보다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반박은, 이타적 무리가 실제로 빨리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타적 무리가 우연히 이기적 무리를 만나는 가능성이 ‘0’이어야 하며, 현실에서는 이럴 가능성이 적다는 내용이었습니다.

Naturalists, as opposed to pen-and-paper men like Wright, knew that such stringent conditions would be tough to find in nature.

여기서도 pen-and-paper men이라고 필자가 라이트를 약간 꼬집는 것 같았어요. 현실은 모르는, 종이와 펜에만 의존한다는.. 영어의 뉘앙스는 못 느끼니, 그렇다고 추측만 해봅니다.

이타심의 수수께끼에 대해서는 라이트의 설명보다는 다른 성과가 더 비중있게 다뤄지지 않았나 합니다.

Wright produced variables adopted to measure kinship, r (coefficient of relationship)

It was equal to 0.5의 n제곱 where n is the number of generations that separate the two.

r: the measurer of genetic relatedness probability that two individuals shared a common gene.

피셔는 genetic relatedness를 계산하는 table을 제시했다고 했는데요, 라이트가 얘기한 친족관계 상관계수, 이 것이 결국 이타심을 설명해내는 수학식에서 의미있게 쓰이게 되는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But Wright never applied r to the problem of altruism.

(하지만 라이트는 r을 이타심의 문제에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이 문장을 보면, 마치 뒤에 나오는 조지 프라이스가 r를 이타심의 문제에 적용해서 일반화된 수학공식으로 이타심의 문제를 표현했다~ 이런 내용으로 이어질 것 같은..

포스트에 표현은 잘 못했지만 3장은 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흥미진진했달까요? 위에서 정리 한 내용 이외에도 홀데인이라는 인물에 대한 주변 설명들도 재미있었고요, 홀데인이 러시아에 갔을 때 자신을 환대하는 생물학자와 같이 다니느라도 러시아의 가난한 생활은 보지 못하고, 러시아를 극찬했다 이런 부분도 기억에 남아요. 러시아에서 생물학자가 굉장히 좋은 대우를 받다가, 나중에 숙청당하고 이런 얘기를 보면 참 세상이 무서운 곳이다 이런 생각도 들고요.

여튼 이정도로 3장은 마무리하렵니다. 이런거 짤방이라고 하나요? 이타심의 기원에 대한 피셔의 설명을 읽으면서 날림으로 그려봤어요. ^^

3장. 라이트가 본 풍경 by nasol

3장에는 진화종합설에 기여한 삼총사, 피셔, 홀데인, 그리고 라이트에 대한 얘기와, 그 뒤에 이 세사람이 과연 ‘이타적인 행위’를 진화의 관점에서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아거님께서 피셔, 홀데인에 대해 쓰셨으니, 나는 라이트의 진화모델과 이타적인 행위를 삼총사는 어떻게 진화적으로 보았는지 정리해보겠다. 쓰다보니 좀 길어져서 두 개의 포스트로 나누어야 겠다.

1. 라이트가 본 풍경과 우연한 사건 (이번 포스트)
2. ‘이타적 행위’에 대한 삼총사의 진화적 설명, 그리고 빈자리 (다음 포스트)

라이트의 진화모델 – 우연이라는 한 축을 더하다.

라이트는 홀데인처럼 막스주의자도 아니었고, 피셔처럼 독실한 신앙인도 아니었다고 소개한다. 이 책이 마음에 드는 것은 학자의 인간적인 면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다. 홀데인하면 헬맷을 쓰고 오토바이 타고 스페인으로 달려가는 게 생각나고, 피셔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자녀를 더 많이 낳도록 해야 사회가 진보할 것이다’라고 소리높여 주장하는 등, 뭐랄까, 똑똑한 것 같지만 매정하기 그지없는 듯한 그런 인상이 남는다. 라이트는 이 둘과 대비해서 약간 조용하고 내성적인 인물로 그려지는데, 밤에 나가 놀때는, 라이터는 학자친구들과 술집에서 논쟁을 하는게 전부인 등, 모범생스럽기도 하고.. 아참 그는 집단 유전학자로 소개된다. (Harvard trained theoretical population geneticist)

여튼 그런 조용하고 내성적인 라이터도, 피셔의 fundamental theorem을 접했을 때는 압도당했다고 한다. 학자들은 이론에 압도당하는구나! 압도당한 적이 있나 떠올려보았다. 생각나는 게 없어서 패스 ㅠㅠ

여튼 fundamental theorem에서 하는 설명이 좀 막연하다고 생각했던 라이터는 이에 용기를 얻어 자기만의 이론을 내놓는다. 이름하여 Shifting balance theory.

라이트의 진화이론

Life was like a lanspace of valleys and mountains…

생명이란 산과 계곡이 있는 풍경과도 같다. 유기체는 산을 오르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정상으로 오를 수록 fitness를 향상시키면서.. 근본정리가 보여준데로, 일단 올라가기 시작하면 방향은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연선택이 윗쪽 방향으로만 밀어주기 때문이다.

뭔가를 파고들면, 파고드는 그것이 ‘무엇’이다.. 라는 자기만의 그림이 있구나. 생명이란 풍경과도 같다. 등등. 라이터가 풍경을 떠올리고, 그것과 생명의 진화와 연결시켰는지, 아니면 생명의 진화에 대한 나름의 이해를 갖추고 보니 그것이 문득 산과 골짜기가 있는 풍경과 비슷하더라하고 생각했는지, 뭐가 먼저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라이터가 이렇게 풍경으로 설명하는 것을 보니, 두 별개의 세계를 그가 연결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물론 이해를 돕기 위해서 좀 친숙한 풍경이라는 소재를 이용했을 수도 있지만, 혹시 모른다. 정말 풍경을 머리에 떠올리면서 그 풍경에서 나타나는 일에서 진화현상을 설명해주는 어떤 일에 대한 아이디어나 힌트를 얻었는지도.

여튼 자연선택이란 윗쪽 방향으로만 올라가게 한다고 했는데 라이트는 이에 의문을 품었다.

But what if the summit was in fact a foothill, not all that towering? Would organisms find themselves stranded with nowhere else to climb?

(하지만 정상이 사실은 높이 솟아있지 않고, 작은 언덕배기에 지나지 않는다면 어쩌나? 언덕을 오르던 유기체는 올라가다가, 정상에 너무 빨리 도달하면, 더 이상 오를 곳을 모르고 발이 묶이려나?)

그러게.. 자연선택에 의하면 계속 올라갈 수 밖에 없는데..  라이트가 제안한 대답은 이것이었다.

진화에 관여하는 힘에는 자연선택도 있지만 다른 힘도 작용한다. 이는 ‘Random Drift(임의적인 표류)’라고 부른다.  (한글로 표류라고 표현한게 좀 걸리지만, 아쉬운데로.. 위키 한글에는 genetic drift를 유전자 부동이라고 표시했는데, 임의적인 부동이라고 하면 정말 의미가 안 와닿을 것 같다. 그래서 이리저리 둥둥 떠다니는 ‘표류’라는 단어를 써본다.)

이해한 바로는, 자연선택이라는 힘은 위로 올라가는 방향성을 부여하고, 임의적인 표류라는 힘은 우연한 사건을 통해, 예를 들면 산으로 올라가던 무리 중의 일부를 뚝 떼어서 다른 곳에 던져넣는 것이다. 이 무리는 그 곳에서 다시 자연선택의 힘에 의해 올라가게 되고.. 이 풍경에는 하나의 무리가 하나의 끝이 보이지 않는 높은 산을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산과 골짜기가 어우러져, 어떤 무리는 언덕을 올라가고 다른 한 무리는 다른 높은 산을 올라가고 있다. 또 어떤 무리는 올라가다가 바람에 날려 골짜기에 떨어지고 또 다시 올라가는 것이다. 라이트는 자신의 이론을 shifting balance theory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의미가 잘 이해가 안된다. 균형점이 바뀌는 이론? 여기서 balance가 의미하는 게 뭘까? 어떤 진화의 핵심축을 가지는 것이 임의적 사건에 의해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걸까? 낮은 산 A를 올라가던 무리가 진화의 축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중에 한 무리가 임의적 사건에 의해 뚝 떨어져서 올라가다보니 새로운 산 B는 훨씬 높더라.. 그럼 결국 진화의 축은 옮겨간 무리로 옮겨간다는 의미인가? 흠. 위키에서 읽어봐야겠다.

김우재님의 글에서 라이트의 ‘서얼’같은 위치에 대해 읽었다. 라이트는 진화를 주관하는 힘으로서 자연선택을 부정한 것이 아니었고, 자연선택 and 임의적 표류 이 둘다 중요한 축이 라고 한건데, 반응은 임의적 표류라는 중요한 축을 제안했다고 환영하는게 아니라, 마치 자연선택을 입지를 깎아내리는 것처럼 받아들였던 것 같다. 위키에 보면 진화에 이 두가지 힘이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어느 힘이 어느 만큼의 역할을 하는지는 아직 논쟁이 있는 것 같다.

라이트의 이론에 대한 피셔의 반응은 냉담했는데,

Mutation is both necessary, random, guiding hand of selection ultimately shaped life. Without it there could be no purpose or end. 라이터의 풍경(landscape)은 picturesque(보기에는 멋지지만) 하지만 생물학적으로는 터무니없다(biologically nonsensical).

돌연변이등 임의적인 요소가 있고, 필요하기도 하지만 진화의 한 축의 지위는 가질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듯 하다. 그런 걸 보면, 당시 자연선택의 입지는 절대적인 ‘신’과 같은 입지가 아니었나 싶다. 큰 뜻과 이상적인 상태에 대한 방향성을 가진 신.. 이러한 신과도 같은 자연선택이 진화를 주관하는데, 방향성이 없는 ‘임의적 요소’가 진화 주관에 동급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과도 같았던 걸까? guiding hand, 주관하는 손이 아니라면, 목적도 완성의 상태도 없을것이다라는 표현은, 목적과 완성상태가 이미 반드시 있는 것이라고 고정해놓은 것 같아서 약간은 답을 정해놓고, 그 답에 어긋나는 것은 틀렸다고 말하는 것 같다.

데모하는 시민의 예, 집단의 크기와 임의적 사건의 영향

라이트는 데모하는 시민의 예를 들어서, 임의적이 사건이 전체의 흐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집단의 크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얘기를 한다. 대로를 따라서 가두시위를 하는 백만의 시민이 있다. 그 대로에는 맨홀구멍이 하나 뚫려있다. 청와대(어디가 되었든 ^^;)를 향하는 시민들이 가다가 한 명이 맨홀구멍에 빠지는 임의적 사건(random event)가 일어난다고 해도, 999,999명이 가두시위하는 흐름에는 별 영향이 없다. 한 명이 맨홀구멍에 빠져서 다쳤던 사망했던 가두시위는 계속 가던 길을 가는 것이다.

하지만 집단의 크기가 작은 경우, 예를 들어 세 명이 가두시위에 참여하려고 열심히 길을 가다가 한 명이 맨홀구멍에 빠진다면, 나머지 두명은 가던 길을 멈추고 병원으로 가던지 할 것이다. 즉 가던 길의 방향 자체가 바뀌는 것이다. 즉 라이트는 집단이 크기가 작을수록, 임의적 사건이 이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고 얘기했다.

투자를 하시는 아는 분이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사실 다 이해는 못했다.) 시장의 현재 변동성이 2인 상태에서 주가가 하루에 1% 변동하는 것과, 시장의 현재 변동성이 4인 상태에서 주가가 하루에 1% 변동하는 것은, 그 미치는 영향이 다르다고.. 물론 시장의 변동성이 작은 상태일 수록, 같은 주가 변동이 미치는 영향이 커진다는 의미였다. 흠 라이터의 얘기와 연결이 되는 걸까? —a

데모하는 시민의 예에서 우연하게 한 명의 시민이 맨홀구멍에 빠지는 것은 유전자적 표류를 의미하는데, 이러한 유전자적 표류는 진화의 목적과는 분리될 거라고 한다.

Genetic drfit will be divorced from the ‘goals’ of evolution.

유전자에서 일어나는 임의적 사건은 반드시 fitness를 증가시키는 방향을 갖지는 않는다는 의미인 것 같다. 자연선택과는 다르다. 자연선택은 fitness를 증가시키는 방향을 갖는다.

여기서 시의적절하게 글쓴이는 자연선택과 유전자적 표류를 대조하면서 설명해준다.

- Unlike its deliberate older brother, drift would not always push organisms to higher genetic peaks.

- If natural selection was the taskmaster of fitness, drift was the shifting sands underfoot, changing the course of week and strong alike.

처음에 읽을땐, 응? 큰 형이 누구지 했는데, 다시 읽어보니 큰 형은 자연선택을 의미한다. divorce, older brother, 사람에 관한 단어를 쓰니 개념이 친숙하게 다가온다. 여튼.. 자연선택은 유기체내 유전자의 fitness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밀어주는 반면, drift, 표류라는 것은 강하든 약하든 관계없이 가던 길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shifting sands underfoot, changing 이 부분이 좀 이해가 미흡하다. 발 밑의 변하기 쉬운 모래가 어떻게 진행방향을 바꾼다는 건지.. )

우연이 주는 희망 – Bright side!

라이트는 밝은 면도 있다고 한다. 이 위안은, 임의적인 사건이 fitness를 증가시키는 방향성을 갖지 않기 때문에 실망했을 독자들을 위한 것일까?

If populations were not large and homogeneous, drift could do what natural selection could never accomplish. .. alter the genetic structure enough to allow a dramatic change in direction.

집단이 크고 동일하지 않다면, 표류는 자연선택이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도 있다고.. 방향에 극적인 변화를 일으킬 정도로 유전자의 구조를 바꿀 수도 있다고..

산과 골짜기가 있는 풍경으로 돌아가서 이런 사건을 상상해보자. 산을 올라가던 한 무리 중에 한 그룹이 골짜기로 떨어진다. 단기적으로는 fitness가 감소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놀라운 기회를 의미할 수도 있다. 작은 언덕배기에서 떨어졌지만, 결국에는 더욱 높은 산의 발밑에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자연선택의 힘을 받아 위로 올라가고, 결국에는 원래 그룹보다 더욱 높은 곳에 도달하게 되는..)

Dive처럼 보인 것이 Liberation을 의미할 수도 있다.

Population shifted between the poles of directed selection and random drift. (집단은 방향성을 갖는 선택과 임의적인 표류 사이에서 왔다갔다 한다. )

방향성을 갖는 자연선택에도 영향을 받아서 위로 올라가다가, 임의적인 표류에 의해서 뚝 떨어지기도 했다가, 또 다시 위로 올라가기도 한다. 그런 의미인 듯 하다. 이제 shifting balance theory 이 이론의 이름이 좀 더 이해가 되는 것 같다.

책은 친절하지만, 내가 노력할 부분

진화에 관한 세명의 모델은 각각 달랐지만, 이 셋 모두 다윈의 자연선택을 극찬했고 (celebrated를 찬양이라고 하자니 좀 어색해서) 셋 모두 진화종합설이 정립되는데 기여했다. 이 진화종합설이 정립되지 않았다면 다윈의 이론은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거라고 이해했다. 음. 다윈이 온갖 관찰을 하면서 자연선택이라는 개념을 파고들었다면, 이 아이디어에 감화를 받은 수학천재 삼총사들이 이 자연선택이라는 개념을 유전자적으로  증명했다.. 수학적 공식으로 나타내고 증명했다..는 얘기 같은데.. 그렇게 증명이 되었기 때문에 다윈의 이론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런 얘기인 것 같은데, 사실 잘 모르겠다. 특히 유전자적으로 증명했다는 것, 수학적으로 증명했다는 게 와닿지가 않는다.  일단 수식이 나오면 집중력이 떨어지는 경향이 생겨 건너뛰게 된다. ㅠㅠ 이 책이 친절하다고 느끼는 것은, 일반인에게 친숙하고 쉬운 예를 들어 진화이론의 전개, 발전 과정에 대해 흥미를 잃지 않고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내 추리력은 뛰어나지 않더라도, 추리 소설을 읽으면 마치 내가 그 추리과정을 무리없이 따라가고 있다는 착각이 드는 것 마냥..  모르지만 아는 듯한 느낌을 주는.. 뭐 그런.

그래도 진화 이론에서 쓰이는 유전자관련한 내용, 생물시간에 들은 기억이 가물가물한 이 용어들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를 하면 좋을 것 같다.  그래서 기본적인 용어들이 계속 나와도 감이 안 잡히면 위키에서 찾아봐서 기본 개념이라도 기억하려고 노력중이다.  진화종합설, 유전자 표류, 유전자 변이, 돌연변이, 등등.. 그런데 한국어 위키는 좀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같다. 영어 위키는 시간은 오래 걸려도, 좀 더 의미가 와닿는 것 같고. 그 차이가 뭘까..


다음번 포스트 예고

여튼 이번 포스트에서는 진화종합설의 정립에 기여한 삼총사 중 한명이 라이트의 shifting balance theory에 대해 소개한 부분을 적어보고, 이런저런 생각을 적어보았다.  이 셋은 자연선택이라는 다윈의 생각을 신봉한 만큼, 다윈과 마찬가지로 동물의 세계에서 발견되는 ‘이타적인 행동’에 대해 의아해했는데, 즉, 이타적인 행동이 어떻게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과정에서 살아남았는지? 이 의문에 대해서 각자 나름대로의 풀이를 내놓는다. 다음번 포스트에는 이타적 행위에 대한 삼총사의 풀이에 대한 부분을 정리해보겠다.  그리고 빈자리도.

3장. (자연) 선택 by 아거

3장은 조지 피셔의 탄생부터 시작해서 20세기초 진화종합설을 정착시킨 유명한 수학자이자 과학자들의 이름이 거의 모두 등장한다: 헉슬리, 니체, 로널드 피셔, 레너드 다윈 (찰스 다윈의 아들), JBS 볼데인.

일단 로널드 A. 피셔. 통계적 방법론이 필수인 자연과학과 경험주의적 사회과학자들이라면 누구나 들어본 적이 있는 그 유명한 피셔다. 3장에서는 우선 “the man who built the mathematical foundation of evolution”으로 소개된다.
진화론을 전개하는데서 수학을 시도하려했던 다윈(1809-1882)은 인생말년에 이렇게 적었다.

“진도가 매우 천천히 나갔다. … 나는 위대한 수학적 원리들을 이해하는데 적어도 내 지식이 그만큼 가지 못했다는 것을 매우 후회했다”

어려서 너무 눈이 나빴던 로널드 피셔(1890-1962)는 기하학적 상상력을 개발해서, 문제를 종이에 적지 않고 머리속으로 이해하는 법을 터득했다고 한다. 피셔의 스승이었던 아서 바살은 수많은 천재들이 런던 보로우 해로우에서 배출되었지만, 그는 ‘피셔와 다른 모든 영재들” 두 부류로 이들을 분류한다고 말했다. 수학적으로 그는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1909년 종의 기원이 출간된 지 50년이 되던 해 익명이 독지가가 오늘날 유전학으로 알려진 생물학에 헌신할 석좌교수 자리에 큰 돈을 기부했다. 이 일이 있기 3년전 윌리엄 베이트슨이 멘델의 유전법칙을 재발견하면서 “genetics”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이 경사로운 순간에 멘델리즘과 다윈이즘은 서로 전쟁에 있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자연선택에 의한 끊임없는 변이가 있을 때 잘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이는 바로 당시 플리밍 젠킨(Fleeming Jenkin)이라는 스콜틀랜드의 엔지니어가 주창했던 이른바 혼합유전의 영향때문이었다.

혼합 유전은 멘델의 유전법칙이 발견되기 전인 19세기까지 유전에 대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이론이다. 혼합 유전에서는 두 부모의 특징이 반반씩 섞여 자식 세대에 전달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붉은 꽃과 흰 꽃의 자식 세대는 분홍 꽃이 되고, 키 큰 사람과 키 작은 사람 사이의 자식은 중간 정도의 키가 된다는 것이다.

이 혼합유전적 생각에 따라 진화는 옴짝달싹 움직일 수 없었다.

20세기 초 멘델의 유전법칙이 재발견되면서 다윈의 진화론의 체면을 세워줄 수 있었을 수도 있었다.

“…but for the fact that so many took them to be the last nail in his metaphorical coffin. After all, the kinds of dramatic ‘mutations’ the Mendelians were beholding, those that turned a fly’s eyes from red to white, or its wings from straight to wrinkly, were a far cry from the supposed tiny variations Darwin’s natural selection was ‘daily and hourly scrutinizing.”

다윈주의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유전자들의 존재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이를 Mendelians’ overwrought imagination으로 간주했다. 반면 윌리엄 베이트슨과 그의 갱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유전자라는 것은 “dew-covered jacket of a Pisum’처럼 실재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20세기초 진화종합설을 정착시켰던 피셔, 볼데인, 서얼 라이트등이 모두 수학의 대가였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서얼 라이트가 고안한 상관관계계수 r 역시 “유전학적 관계성의 측정치” 즉 “두 사람이 같은 유전자를 공유할 확률”에서 나왔다.

문제와 해결은 여기에 있었다: biometricians들은 누구도 볼 수 없기에 유전자의 존재를 기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와 같은 유전자적 형질에서 발견되는 벨 커브 — 따로 떨어진 막대바가 아닌 — 를 통해서 자연에서 분절적인 변이가 아닌 유전자의 변이들이 일어난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마침내 의심많은 스코틀랜드파들에게 일격을 가하는 답이 나왔다:

Genes and their chromosome adobes were immortal. Unlike paint, they did not blend. Whether they were dominant and expressed or recessive and latent, whether they interacted or were simply additive, they passed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more faithfully than endowments and even surnames.

이로써 멘델리안들은 다윈의 메커니즘을 묻어버렸다고 생각했으나 유전학은 블렌딩의 난제를 풀었을 뿐만 아니라, 진화론의 퍼즐에서 빠진 부분을 채워준 격이 되어 버렸다.

니체는 “ethics were threatened by evolution only if nature was considered improper.”라고 했고, 피셔는 이런 ‘더러운 생각’이 정당화 받을 수 없음을 보여줬다.

1838년 런던 동물원에 갔다온 다윈은 “바분을 이해하는 사람은 존 로크가 형이상학에 대해 했던 것보다 더 많은 공헌을 할 수 있다”고 했다. [Penn 생물학자 도로시 체니가 쓴 "Baboon Metaphysics"란 책도 있다.]
피셔도 이에 동의했지만 다윈이 이보다 한발 더 나아갔다고 보았다. 종의 기원의 수학적 멘델리안처럼 보이는 부록에서 다윈은 그의 영적인 조부가 상상했을 것 같은 것을 증명했다: 바로 자연선택은 인간의 친절함에 씨를 뿌리고 계속해서 물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In the grand evolutionary tale, morality made man fitter, which was precisely why Fisher was growing worried.”

부(wealth)라는 것은 악마이다. 왜냐하면 더 많이 소유할수록 그는 덜 번식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식이 많으면 돌아갈 실버 파이는 가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 현대사회에서 영아살해의 충동은 피임에 의해 대체될 것인데 이는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들의 칼집이다…

God had met entropy by introducing natural selection, but avarice might frustrate his design.

피셔는 다행스럽게도 신은 책임과 경우라는 두가지 선물을 제공해서, 그의 피조물들을 자유의지의 능력으로 무장시켰다고 보았다. 피셔의 자연선택에 관한 근본적 이론은 자연선택을 통해 인간은 그의 유전적 최선으로 한발짝 더 나아간다고 보았다. 이런 의미에서 피셔는 BBC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창세기의 언어로 우리는 6일째, 그것도 아마 이른 아침에 살고 있다.”

과학자였지만 성공회 교도이기도 했던 피셔는 “창조적 예술가께선 아직 그의 (창조) 일을 끝내고 뒤로 물러서서 ‘아주 잘됐어’라고 선언하지 않았다”라고 말함으로써,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의 과정으로서 창조론을 해석한 것이다. 이 말속에서 우리는 물론 우생학적 생각의 단면을 볼 수 있다.

3장은 자연스럽게 JBS 홀데인의 생애로 넘어간다. 피셔와 홀데인 모두 자연선택을 지지하고 정립시키는데 공헌했지만, 여러가지 면에서 달랐다. 일단 정치적으로 보수적이고 기독교적인데 반해, 홀데인은 공산주의를 지지한 무신론자였다. 둘 다 자연선택이 진화론적 변화의 동인이라고 보았지만, 피셔가 자연선택을 숭상한 반면, 홀데인은 자연선택을 purifying하는 것은 “chanciness of genetic mutation”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앞에서 말한대로 홀데인은 자연선택적 생각을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산업혁명으로 인해 런던의 후추나방(black peppered moth)들가운데 검정색이 선택적 우위를 차지할 확률을 수학적으로 예측한 것도 JBS 홀데인이었다.

다윈은 150년전 ‘종의 기원’에서 생물의 종은 환경에 적합한 방향으로 진화한다는 ‘자연선택설’을 주장하였다. 자연선택설은 소위 ‘다윈의 나방’이라 불리는 후추나방의 사례를 그 대표로 한다.

후추나방은 본래 흰색바탕에 검은색 작은 반점이 있는 나방이다. 산업혁명이후 영국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흰색나방이 감소하고 검은색 나방이 증가했다. 산업화로 공기가 오염되면서 나무에 자라는 이끼가 죽고 나무는 검은색 검댕이가 자리잡았다. 이 결과 검은색으로 변한 나무가지에 붙어있던 흰색이 강한 나방은 천적인 새들의 먹이가 되기 쉬었고, 나방은 검은색으로 진화를 하며 변화된 자연환경에서 생존을 한 것이다. [호주 미디어 속의 한국]

3장을 읽다가 대학때 읽었던 엥겔스의 유명한 구절을 다시 보게 되었다:
피셔가 상류층에 의존한 반면, 홀데인은 급진적 정치를 선택했고 엥겔스의 저작에 나오는 구절을 암송하고 다녔다고 한다:

the real content of the proletarian demand for equality is the demand for the abolition of classes. Any demand for equality which goes beyond that, of necessity passes into absurdity.

JBS 홀데인은 “사회의 진보는 과학의 진보적 적용에 달려 있다” (The progress of society depends on the progressive application of science.)고 믿었다.

책의 후반부에는 20세기초 진화 종합설의 3총사로 불려지는 서얼 라이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잠와서 중단….

2장. 뉴욕 by 아거

2장에는 특별한 내용이 없다. 이 장은 조지 프라이스가 탄생한 뉴욕을 무대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야기의 첫 등장인물은 윌리엄 에디슨 프라이스. 조지 프라이스의 아버지다. 조지가 태어난 후 4년만에 아버지는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고, 무대는 빠르게 29년 미국 대공황 시절로 이어진다. 물론 그런 암울한 시절에도 뉴요커들에게는 잊지 못할 30년대가 찾아온다. 베이비 루스의 신화에 이어 35년 베이비 루스를 방출한 뉴욕양키스가 루키 조 디마지오의 활약으로 월드 시리즈를 거머쥔다. 수퍼맨도 탄생했다. 책에서는 조지 프라이스를 ‘조용하고 내성적인 소년’이었지만 그를 둘러싼 뉴욕은 달랐다. 2장에서는 그의 형 Edison과 조지의 성격과 성장 과정을 대비시키며 조지의 천재적 학창 시절의 일화를 들려준다.

Inspired by the name and scenes at the Apollo, at fourteen he produced a seventy-page paper on Greek temple architecture that would have satisfied any university professor.

17살 때, 조지 프라이스는 물리학자를 꿈꾸었고 수학을 좋아했다. 학교의 트랙코치는 인생을 전투에 비교하고 성공을 위해 투쟁정신을 고취시켰던 반면, 교장선생은 교육에서 영적 가치를 중시 여겼다고 한다. 교장선생이 졸업반 아이들에게 한 연설의 한 대목이다.

We lost our horizons because our vision becomes dimmed through greed or lust or want of charity. And nations also lose their horizons for the very same reasons. If you would know where to find the lost horizon, then hold fast to the ideals of your youth and no matter what the cost, choose to do the right and follow the bettery way…

여름방학때 조지는 왈튼의 농장에 가서 텐트속에 생활하며 파리를 죽이는 일과 책 읽고 자고 소요하고 했다. 그가 가져간 20여권의 책에서 그가 가장 좋아했던 책은 러셀의 introduction to mathematical philosophy였다.

조지가 고등학교를 2등으로 졸업했을 때, 세계는 전쟁의 암운이 깔렸다. 히틀러가 Low Countries들을 침공했고 무솔리니의 도움으로 프랑스를 쳐서 항복을 받았다.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다윈 Naysayer들의 다윈주의적 삶 by 아거

For the Darwinian, our species is, in the decisive respect, just like the others. Each member of the species exists to serve the species, and our happiness comes from doing our duty to the species as social mammals—basically by pair bonding, reproducing, raising the young, and then dying (or stepping aside for our replacements as nature requires). My ultimate point in life is to successfully spread my genes.

Meanwhile, the Darwin deniers—mainly religiously observant Christians—are living more as Darwin would predict. They’re having lots of babies, raising them responsibly, and are less edgy about the prospects of getting old and getting dead. Somewhat might say that those, through faith in a personal and active Creator, who have confidence that their personal identity and significance aren’t merely biological are more able to relax and enjoy what nature offers them. Odd Observations about Darwin and American 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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