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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의 불길한 느낌과 신체표지자 가설 (I)

January 31st, 2010 Leave a comment Go to comments

미국의 인기토크쇼 콜베르 리포트(Colbert Report) 진행자 스티브 콜베르(Stephen Colbert)는 언젠가 How we decide의 저자 조나 레러를 초청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런 질문을 했다.

“조나. 그래서 당신은 직감(gut)이 뇌보다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는가?”

이 질문을 한 이유는 조나 레러가 사람들이 결정을 할 때는 감성과 이성적 뇌의 작용이 일어난다고 했기 때문이다. 과학적 관점에서 그 질문은 다소 기본에서 벗어나 있다. 그런데 그 다음 질문은 정말 날카로웠다. 스티브 콜베르는 조나 레러에게

‘사람들이 순전히 이성에 의해서만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있는가? 아니면 결정이라는 것에는 언제나 감정이 녹아들어있는 것인가?’

라고 물었다. 이 질문은 토크쇼의 환담수준에서 논의할 문제 수준을 넘어 과학자들이 대를 이어 연구하는 중요한 연구과제다. 그렇다면 왜 처음 질문은 기본에서 벗어났고, 왜 두번째 질문은 과학자들이 평생 걸쳐 탐구하는 연구문제일까?

카네기멜론 대학교의 조지 로웬스타인은 언젠가 “(의사/선택) 결정이론은 그 뛰어난 설명력에도 불구하고 감정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못함으로써 다소 절름발이 이론이 되었다.” 고 주장했다. 사실 오랜 세월동안 선택과 결정을 이야기할 때 감정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마치 중요한 토론을 할 때 감정을 개입하는 것처럼 문제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물론 사람들은 전적으로 이성적 판단이 선택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적으로 이성적 판단이 작용한다면 왜 세상에는 부모가 용인할 수 없는 자식의 눈먼 배우자 선택을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원수의 집안이면서 사랑할 수 밖에 없고 비극으로 끝날 것을 알면서도 헤어질 수 없는 로미오와 줄리엣은 애초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133.jpeg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을 이야기할 때면, 늘 이성의 작용안에서만 논의되었던 이유는 사람들이 감정을 뇌와 분리해서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대 희랍의 철학가들은 마음과 몸의 분리를 생각했는데 그중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음이 심장에 자리한다고 생각했다. 플라톤은 물론 다르게 생각했지만, 마음과 몸의 이원설을 주장하는 사상가들 가운데 마음이 뇌에 존재한다는 생각이 정교해 진 것은 훗날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에 와서였다 (Carter, R., 1998). 그래도 여전히 사랑의 감정을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하트를 떠올리고 내 심장이 터질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아. 그녀를 너무 사랑해서 내 뇌가 터질 것 같아’라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신경의학 혹은 뉴로사이언스 관련 연구의 비약적 발전으로 이제 감정이 뇌의 작용일 뿐만 아니라, 감정이 선택이나 결정 행위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 하나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패러다임의 전환을 주도한 과학자가 바로 안토니오 다마시오 박사이다. 다마시오의 주장의 핵심은 감정이 이성을 주도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감정과 동떨어진 순수한 작용이 아닐지도 모르며 어쩌면 감정과 이성은 뇌의 네트워크에서 함께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한 발 더나가 인간의 몸을 규제하는 감정과 느낌의 작용없이는 진화의 과정에서 인간에겐 이성의 작용이라는 것도 발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이 주장이 구체화된 것이 이른바 신체 표지자 가설 (Somatic Marker Hypothesis)이다. 내가 택한 선택의 옵션과 연관되어 뭔가 나쁜 결과가 마음에 전달될 때 이게 아무리 짧은 순간이라도 뭔가 유쾌하지 못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드라마 주몽의 한 장면을 보자. 자기가 사라져야 주몽과 자신이 사랑했던 유화 부인이 행복할 것이라고 믿고 떠날 결심을 굳힌 해모수는 주몽에게 가서 어머니를 만나고 오라고 말한다. 이 순간 해모수를 죽이러 주몽의 이복형 대소는 군사를 이끌고 오고 있었다. ‘스승님 다녀오겠습니다’고 말하고 길을 가던 주몽은 뭔가 느낌이 좋지 않은지 고개를 두어발자국 뒤에 다시 스승을 돌아다 본다. 바로 이 찰나의 불길한 느낌이 전해지는 현상이 바로 신체 표지자 가설에서 지칭하는 판단에 앞선 감정이나 느낌의 역할이다. 데카르트의 오류라는 책에서 다마시오 박사는

“그런 느낌은 온통 몸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주몽이 느꼈던 것과 같은) 그런 몸에 나타난 현상에 somatic state (신체적 상태)라는 전문용어를 부여했다. somatic은 물론 그리스어에서 몸을 지칭하는 soma에서 온 것이다. 또 그 몸의 반응들은 하나의 이미지를 표식/표지(mark)하기에 나는 그것을 표지자(a marker)라고 했다”

고 설명한다.

신체표지자 가설은 이성에게 사랑의 감정이 느낄 때 내 안에 일어나는 몸의 반응과 같은 즐겁고 흥분되는 현상도 설명할 수 있다. 짝사랑하고 있는 이성이 내 앞에 있을 때 내 심장의 박동과 얼굴의 홍조, 이런 것들은 모두 내 뇌안에 있는 이성의 작용을 안내하는 지표자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경험을 통해 생기는 좋고 싫은 감정이나 느낌들이 내 몸안의 반응을 만들어 내고 이 반응이 일종의 표지가 되어 무의식적으로 내 행위를 안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신이 짝사랑하는 그(녀)를 위해 종이학 백마리를 접기로 결심했다는 것은 결국 당신 이성의 작용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신체표지자 가설과 선택 (II)]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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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irrie
    January 31st, 2010 at 22:54 | #1

    그러니까, 짝사랑하는 대상 앞에 섰을 때의 신체적 반응들을 통해서 우리는 ‘아, 내가 얘를 좋아하는구나!’ 하고 판단한다는 것이 신체표지의 내용인가요? (극도로 간략하게 이야기하자면, 말이죠 ^^;;)

    그런데 제가 여기서 ‘그렇다면 그런 신체 표식들은 어디서 연유합니까?’ 하고 물으면 뭔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건가요?

    “… 또 그 몸의 반응들은 하나의 이미지를 표식/표지(mark)하기 ..”

    라는 문장으로 미루어 보자면, 신체표식이 의식이라기 보다는 ‘무의식’에 가까운 어떤 이미지들을 표지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미지 그 자체인 것과 신체표식은 불가분의 관계라기 보다는 기표/기의의 구조처럼 약속된 내용으로 이해됩니다. 즉, ‘무의식’ (혹은 명확하게 인지 불가능한 이미지들) -> ‘신체 표지’ -> 의식 의 흐름에 있어서 신체 표지가 의식 상태를 유도한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지만, ‘어떤 의식 상태’를 유도하는지 알 수 있는 보편적 판단기준은 부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본문 중간에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적 사랑이야기가 예로 나와서 이를 통해 보자면, 과연 이성적 판단 이전에 감정적인 신체 표지들이 그들의 비극적 사랑의 결말을 설명할 수 있겠느냐, 는 것이죠.

    • 아거
      February 1st, 2010 at 00:26 | #2

      신체표지의 핵심은 몸으로 받아들여지는 느낌이나 감정이 뇌에서 일어나는 이성적 작용을 견인하는 marker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의식과 무의식적 선택에서 신체표지자의 역할에 대해서는 두번째 글에서 더 자세하게 다뤘습니다.

  2. 아거
    November 12th, 2011 at 08:27 | #3

    Addendum:
    “The mind is a cluster of apps or modules securing the replication of the genes that are expressed in our bodies.” http://on.wsj.com/srO2dH

  1. February 1st, 2010 at 00:18 | #1
  2. February 3rd, 2010 at 15:08 | #2
  3. July 1st, 2010 at 08:07 | #3